C3 334호_1206

20,000

− 용산공원 국제설계공모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 _ 웨스트 8+이로재
− 흐릇 바이벌스버그 공원
− 붉은 도시의 축제, 제4회 마라케시 비엔날레

콘크리트의 진화
콘크리트, 구조에서 표현으로 _ 넬슨 모타
− 아데제 종교 미술 박물관과 광장 _ 메니스 아르끼떽또스
− 유리혼조 시 카다레 문화센터 _ 치아키 아라이 어반 앤 아키텍쳐 디자인
− USJ 대학 스포츠 혁신센터 _ 109 악쉬텍츠+유세프 토미
− 바이센테니얼 시민회관 _ 루씨오 모리니+GGMPU 아르끼떽또스
− 망통 장 콕토 박물관 _ 루디 휘치오티 악쉬텍트
− 아르고스, 시멘트 공장의 전기 발전소 건물 _ MGP 아키텍쳐 앤 얼바니즘
− 브라질 중소기업진흥청 _ 그루포 SP

마드리드 카라방첼
도시를 다시 쓰다 _ 마르따 곤살레스 안똔
− 168세대의 소규모 공공주택 _ 코코 아르끼떽또스
− 금속 상자를 쌓은듯한 82호의 공공주택 _ 아만-까노바스-마루리
− 이동식 벽으로 만들어진 집 _ 아란구렌 앤 갈예고스 아르끼떽또스
− 차양이 있는 공공주택단지 _ 셰퍼드 롭슨
− 101세대 공공주택단지 _ 호세 크루즈 오발레
− 삶을 위한 기계, 102 공공주택 _ 도스마쓰누 아르끼떽또스
− 88세대의 공공주택 _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 아키텍쳐
− 141세대의 공공주택 _ 모포시스

 

카테고리:

콘크리트의 진화
콘크리트, 구조에서 표현으로 _ 넬슨 모타

콘크리트를 건축 재료로 사용한 지도 어느덧 100년이 넘었다. 지난 세기, 철근 콘크리트는 근대사조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일반 주택 양식을 새롭게 해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콘크리트는 언제나 대중에게 가깝고도 먼 존재였다. 콘크리트에 대한 건축가들의 신뢰는 거의 맹목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렀지만, 대중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다.
이 글에서는 콘크리트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기만 한 존재인지, 아니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콘크리트가 여전히 전위적인 건축적 표현을 가능케 하는 특징이 있는지, 이미 일상적인 행위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담고있다.
전후 건축문화에서 콘크리트는 레이너 밴험의 ‘새로운 브루탈리즘’에서 알려진 대로 윤리적 접근과 미학적 접근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논의를 키워나갔다. 당시 건축가들은 철근 콘크리트의 구조-기술적, 구조-상징적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탐구했고, 그 결과, 구조적 요소로 직접 쓰이는 경우와 건물을 ‘단장’하기 위한 재료로 쓰이는 경우로 나뉘었다.
콘크리트의 기술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는 오늘날 건축문화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서 재료의 역학적 특성은 오래 전부터 입증된 사실이지만, 건물 마감재로서의 콘크리트의 잠재성은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콘크리트에 대해 양분화된 대중의 반응은 건축가들이 이를 중립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들은 주로 콘크리트를 주어진 재료의 조건이나 사회 정치적 맥락에 대한 자신의 명백한 관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분명한 사실은 구조를 넘어 표현의 재료로 진화하고 있는 콘크리트와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카라방첼
도시를 다시 쓰다 _ 마르따 곤살레스 안똔

프란시스코의 고야의 1788년 작, ‘축제날의 산 이시드로 초원’은 서로 다른 계급 간의 화합을 그려낸 풍속화다. 부호들과 그들을 대하던 여자들, 마하와 마호1, 장사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강변의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륜마차나 사륜마차, 고급 매춘부들의 마차와 소시민들이 이용했던 수레까지 온갖 종류의 탈것들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그림은 풍경화로도 볼 수 있다. 그림의 제목 그대로 카라방첼 지구의 초원에서부터 마드리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만자나레스 강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묘사된 이 지역은 당시 상류층에서 휴양지나 거주지로 인기있던 곳이다. 강 건너 완만한 언덕 위에 솟은 교회의 돔과 종탑, 그리고 귀족들의 성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이때 카라방첼의 인구수는 겨우 2,8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이후, 카라방첼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나 수치화 할 수 있는 인구 수는 물론, 지역의 분위기까지도 고야가 그려냈던 카라방첼과는 다르다. 1940년대 후반, 마드리드를 유럽의 다른 수도들과 비슷한 규모와 중요성을 가진 도시로 만들기 위해, 카라방첼을 비롯한 주변 지역은 마드리드 지방자치구역에 합병되었고, 그 결과 카라방첼은 현재 마드리드 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지역 중에 하나가 되었다.
사실 많은 이들은 카라방첼이라는 이름에서 악명 높은 교도소를 먼저 떠올린다. 1940년, 스페인 내전 직후 정치범들을 동원해 건설한 이 교도소는 프랑코 독재 시절 수 많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수용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도시화의 물결이 거셌던 60~70년대를 거치며 이 지역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한층 뚜렷해졌다. 농촌 지역의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면서 이 지역의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에는 남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까지 이곳으로 몰려들어 현재는 마드리드에서 대표적인 이민자 거주지역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11년 이 지역의 인구는 26만 명에 달하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중하층 노동자들이다.

추가 정보

발행호

C3 no.334_2012 6월호

페이지

208

규격

225mm x 300mm

제본

pur제본+자켓

언어

국어+영어

ISSN

2092-5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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